이봐, 인생을 던져!

[스크랩] 1-5 투쟁의 근거지, 일본

퐁당퐁당 당수 2014. 4. 16. 10:31

 

-투쟁의 근거지, 일본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2>(김승희)

 

 

 

 

 

 

이 패션은 국내에서 훨씬 후에나 유행되었다.

유학시절 방학 때, 서울거리를 이렇게 기워지거나 찢겨진 청바지 차림으로 다녔는데, 여고생들은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1985년 나는 도일(渡日)을 했다.

 

태어나 처음 가보는 외국이었다.

 

내 몸을 실은 비행기가 ‘설마 일본 아닌 다른 나라로 가고있는 건 아닐테지?’라는 기우는 단번에 해소되었다.

2시간 남짓해서 목적지 오사카(大阪)의 '이타미(伊丹)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일본은 내가 학교나 교과서에서 배웠던 나라와는 많이 달랐다.

왠지 일본인 머리 양쪽에는 두 뿔이라도 나있을 것만 같았었는데, 그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터무니없는 상상임을 깨닫고 혼자 배시시 웃었다.

 

일본인을 대하면서 이들이 부러웠던 것은, 이 나라 청년들은 20살이 되어도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감수성 넘치는 나이, 수많은 인생경험, 사회적 경험을 쌓아야 할 그 나이에 우리는 일본인들처럼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군대에서 살인을 훈련받아야만 한다.

 

또 그들은 어릴 때 수영학습은 기본이란다. “한국인은 왜 수영을 잘 못하느냐?”라는 일본친구의 질문에 나는 '우리나라는 아직 너희나라처럼 제대로 된 풀장 하나 갖고 있지 않으니, 배울 기회가 없었다.'라고 하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너네들처럼 사방이 바다가 아니고, 삼면만이 바다라서...”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참 썰렁한 개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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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사라진 거리

                                                                                            작사/작곡 : 오자키 유타카(尾崎 豊)

 

길바닥에 쓰러진듯 잠든 사람이 있어

한번은 쳐다보지만 곧바로 눈을 피해 지나가 버리지

누구나 불행해질지도 모르는 자신을 지키려

자신의 사랑을 쏟는 것도 바보짓같아서 하지 못해

멍청한 사람들의 무리

 

나 또한 미래를 모르는 불안함 속에 있어

지금도 겨우 살아가니 마음에 여유도 없어

돈도 못버는 학생이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어떤 놈들도 결국은 자신의 장래 이외는

어찌됐든 상관없다고 생각할거야

 

사랑이 사라진 거리, 예전부터 그래왔던 걸까

그래 당연하다고 말하기엔 난 아직 너무 어려

찾고싶어 찾고싶어 사랑의 빛을

 

사랑이란 말을 함께 말하길 싫어하는 것도

대체 뭐가 사랑인건지 그건 누구도 알지못하기 때문이야

남과 여, 마음보다 몸으로 서로 위로하며

마음을 찾아 미로를 헤매다

쓰러지는게 보이지?

 

우리둘 또한 미래를 모르는 불안함 속에 있어

사랑을 맹세하고 지키는 게 전부라고 믿고

아이도 못낳는 세상을 이해못하는 두 사람에게

대체 어떤 사랑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오, 지금 여기에

 

사랑이 사라진 거리야, 예전부터 그랬던 걸까

그게 당연하다고 말하기엔 난 아직 너무 어려

찾고싶어 찾고싶어 사랑의 빛을

믿고싶어 믿고싶어 사랑의 빛을

 

 

 

  

 

 

1980년대라고 하는 시대의 막이 열릴 즈음 10대의 친구, 오자키 유타카(尾崎豊)는 혜성처럼 나타나 지구축을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팬들로부터 광신할 정도의 추앙을 받고있는 (당시) 젊은이들의 교주이자, 슈퍼스타, 가수 오자키 유타카는 22년 전, 전기 쇼크사로 죽었다. (그를 한국가수와 굳이 비교하자면, 서태지 쯤으로 비유될 수 있을까....) 

 

1985년 8월 오사카 구장 공연에서 나는 무대 위에서 기타를 때려부수고 헐크처럼 포효하는, 성난 일본 젊은이들(Angry Young Men)의 아이돌 가수, 오자키 유타카의 모습을 처음 만난다. 그는 무척 화가 나있는 듯 보였다. 붉은 조명 탓이었을까?

 

그리고...

1992년 4월30일.

눈물과 아우성으로 뒤범벅이 된 그의 장례식장 고코쿠지<護國寺: 도쿄(東京) 분쿄구(文京區)에 있음>.

이 날, 오자키 유타카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일본의 소년소녀는 3, 4만 명에 달했다. 2킬로가 넘는 '빗속의 장례행렬'이었다.

 

 

나는 최근에 일본여성 밴드그룹 '버섯제국'이 부르는 재즈풍의 노래 하나를 들었는데, 느낌이 오자키의 노래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불러보곤 한다.

 

 

[동이 트면]                               

 

                                          노래: 버섯제국

                                           번역: 김경원

 

1

눈을 뜨면 용기를 내어 일어나, 누군가를 만나고파

열쇠도 안걸고 방에서 나와 한밤중 하늘을 걷는다

요즘엔 헤어도 손톱도 안자르고, 복수도 두려워하지 않지.

아무것도 먹고싶지않고, 줄곧 생각만 하고 있다.

복수가 시작된다면, 그 끝은 대체 어디일까?

지은 죄 씻을 수 없는 과거, 결코 그대를 용서못해요.

그래도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영어로 가볍게 얘기하네.

그래. 깨달은 만큼 언젠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닐거야.

오호우~~ 오호우~~ 오호우~~

 

2

그 애가 울고 있던 밤, 그 아이는 웃고 있었다

그대는 죄를 지었고, 누군가는 그걸 보고 있었지.

떠올려도 어쩔 수 없는 일. 집으로 가자. 이 밤이 다 되면.

복수가 시작된다면, 그 끝은 대체 어디일까?

지은 죄 씻을 수 없는 과거, 결코 그대를 용서못해요.

그래도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영어로 가볍게 얘기하네.

그래. 깨달은 만큼 언젠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닐거야.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동이 트면, 동이 터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그런 느낌이 들어

살아있어. 그대..눈물이 넘쳐흐르네요.

동이 터요. 동이 터요. 동이 터요. 동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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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도착한 지 몇 달 쯤이 지났을까...

밤중에 멀리서 들리는 개짖는 소리를 들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세계 어딜 가도 개의 언어는 같은가 보다.

 

한국에서 가져온 카셋 테잎,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의 노래 ‘친구’ 를 들으며 잠을 청하려고, 쏘니 카셋을 머리맡에 준비해 두었으나, 막상 그 노래를 듣자하니 자꾸 목끝이 울컥거려와 스위치를 누를 수가 없었다.

 

일본이라고 하는 망망대해에 나 홀로 있는 것만 같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초보일어를 구사하는 일본어 학교 한국학생, 임경수 등과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오사카(大阪) 우메다(梅田)에 위치한 '산케이(産經) 일본어 학교' 에 다녔는데, 내가 국내에서 근무했던 합동통신(두산그룹계열)에서 두산기획실 사람들과 함께 틈틈히 일어공부를 해둔 것도 도움이 되었다.

 

 

                                                    미야가와 야스코(宮川康子) 일본어 선생과 글쓴이

 

 

                                                         동창생 임경수<현재 (주)아스테크 대표>와

 

 

그 학교의 일본어 시험 때, 외국인 학생 중 내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나를 예뻐해주던 미야가와 야스코(宮川康子) 선생은 일본의 운전면허 시험이 독일처럼 까다롭긴 하나 운전면허 시험을 치뤄보라고 제안했다.

 

‘일본어 실력을 더 늘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결국 일본 운전면허 시험을 치뤄보기로 정했다. 내가 과연 일본에서 살아갈 자격을 갖추고 있는 지, 아닌 지도 검증해볼 겸. 연극할 때 대사를 외우듯, 면허시험 책을 달달 외울 정도로 집중했다.

 

‘만약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한국으로 돌아가리라.’

 

그러한 원칙을 세우고 열공을 각오했던 나는 초반부터 마음을 다치고 만다.

 

운전면허 수업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이었다.

행정담당자가 생도들에게 '지각의 기준'에 대해 미리 말해주고 있었는데, 난 이 순간 일본사람들에게 정내미가 똑 떨어졌다.

수업챠임벨 소리가 나는 순간, 교실 문턱 안으로 한 발이 넘어가 딛고있으면 지각이 아니고 그렇지 않으면 지각으로 친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뭐든지 대충인 것이 없는 일본이다.

 

이렇게 시작된 운전면허 필기시험에는 패스를 했으나, 도로주행 시험에서는 2번이나 떨어졌다.

 

“부레이키...아쿠세루....”

“아 네에. 브레이크! 악셀!”

“이거 큰일 나겠구먼. 다시한번! 부레이키...아쿠세루...”

“.....!”

 

지인 연극인, 사이토 아키라(濟藤 章)에게 왜 ‘악셀’이지 ‘아쿠세루’라고 하냐며 선생발음이 나쁜 거 아니냐고 내가 당한 울화통을 털어놓았는데, 그는 내게 충언을 하나 건네주었다. 다음번 시험볼 땐 민낯으로 가지말고, 격식을 차려 의상도 제대로 입고, 예쁘게 화장도 하고 가보라고 했다. 이건 뭐 수험생들의 태도를 겉모습까지 체크/심사한다는 것인지?...

 

내가 화장을 해서 패스가 되었는 지, 어쨌는지는 지금도 알 수는 없는 일이나, 아뭏튼 그리해 내게는 영주권이나 다름없는 일본 운전면허증을 손에 쥐게 된다.

 

2013년 제10회 EBS 국제다큐영화제에 출품되었던 다큐작 <운전 어디서 배웠니? (And Who Taught You to Drive?) >(감독: 안드레아 티라).

 

한 미국청년이 일본에서 운전면허를 7번이나 떨어졌었는데, 면접 때 넥타이 포함 정장차림으로 나가보라고 조언하는  장면이 있다.

 

이 영화는 각 나라에서 운전면허를 따려는 3인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그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코미디 이상의 큰 공감과 웃음을 준다.

 

외국에서의 운전은 단순히 차를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법과 낯선 문화에 적응하는 일인가 보다.

 

또 일본과 한국은 사람의 겉 모습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문화도 닮아있다고 치부하는 것은 큰 오산!

차라리 그들의 생김새가 서양인처럼 코가 크든 지, 아니면 외계인처럼 귀라도 독특히 생겼던지 해야 서로에게 쿨할 수 있을 지 모른다.

 

나는 한국인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일본인들과 어떤 일(특히 비즈니스)을 도모할 때, 그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해서는 오산이라고.

그들은 일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다고.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문화 차이는 일본식당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동을 먹을 때, 단무지를 좀 더 달라고 하니, 반달모양 단무지 딱 3조각을 내민다. 그것도 계산을 해야 한다.

난 그 우동을 먹기도 전에 비위가 상해버렸다.

 

건강상 빨간불이 켜지는 날들이 늘었다.

 

청진기를 귀에 꽂은 동네 할아버지 의사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요즘 좀처럼 보기드문 병인데요...”

 

내심 놀라고 있는 내게

 

“영양실조와 비슷한 증세로 보입니다!”

 

무엇인가에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일본에 와선 먹는 일에 전혀 신경을 못쓰고 살았다. 늘 먹을 것을 챙겨주시던 내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그리워졌다.

집안 구석구석에 풍기는 생강, 참기름, 깨, 젓갈 내음을 못맡아본 지도 벌써 몇 년이나 흘렀다.

나는 그 내음들이 그리웠다.

 

나름 일본사회에 적응해보려고 일부러 먹지 않았던, 그 음식들을 다시 먹어보리라 굳게 다짐을 하고 추루하시(鶴橋: 한국시장)에 가서 한국음식을 구입했다.

-독일에서 유학한 친구 왈, 어느날 짜장면이 먹고싶어 견딜 수가 없어서 하룻밤 내내 아우토반 위를 달려가 먹고야 말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나라에 비하면 일본유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사회는 조선(한국/북조선)인들에 대해 차별이 있다. 젊은이들은 꼭 그렇지는 않았으나, 나이든 세대일 수록 그렇다.

 

“조선인은 뭘 해도 제대로 못한단 말이야!”

“너네 나라에도 숫자가 있냐?”

“너네 나라 수박도 이렇게 동그라냐?”

 

고 어떤 작고 못생긴 노부부가 내게 이렇게 물어온 적이 있었다.

 

등퇴교 시간, 지하철 안에서 어쩌다가 옷에서 마늘냄새라도 풍기면 일본인들은 특유의 표정으로 소리없는 이지메를 한다.

 

조선인 부락마을 골목길을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한다면, 우선 코를 두 손가락으로 꽉 틀어막은 뒤, 숨을 쉬지도 내쉬지도 말고 단숨에 달리야 하노라고 꼬마들에게 조언하는 일본인 어른도 있다. 우리 조선(한국/북조선)사람을 돼지와 같은 가축으로 취급하는 꼴이다!

 

'오사카 심포니홀'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은 '아리랑'

 

내 두 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이곳에서 내가 귀에 담은 '아리랑'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도 슬픈 곡이었다.)

한국 유학생들의 모임 때 '애국가'를 불렀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외국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건 맞는 말이다.

 

 

 

▶ 「아리랑」과 '한겨레 음악회'

 

'한겨레 음악회'(기획: 이철우)는 김홍재(북녘 작곡가)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인데, 1989년을 제1회로 하여 1993년까지 총 5회에 걸친 음악행사 '해외동포 음악가 초청 시리즈'이다.

(제1회 실행위원장은 사쿠라 그룹 회장이었던 전진식이 맡았고 제2회부터는 재일 상공인 신창식이 맡았다.)

 

1988년 오사카 심포니홀의 '1000명 콘서트 - 오케스트라와 우리 여성들의 합창'이 성공하면서 제1회 '한겨레 음악회'도 1700여 객석이 가득차는 대성공을 거둔다.

 

관객들은 주로 남북한 재일동포들로 메워졌으며, '코리아 레코드 컴퍼니'가 주최한 이 연주회에는 김홍재(지휘자), 김미아(바이올린 연주자. 미국 주재), 한가야(피아노 연주자. 독일 주재) 등이 참가, 이 날의 레파토리로는「아리랑」'사향가(思鄕歌)' '광주여 영원하라'(작곡: 윤이상) 등이었다.

 

이후 1993년 4월 '도쿄 예술극장'의 '한겨레의 음악 윤이상특집'으로 꾸며졌던 이 행사 마지막 회 콘서트 1부는 「서도아리랑을 테마로 한 환상곡」으로 선정,「관현악곡 아리랑」 (도쿄시티 필 하모니 교향악단)등이 연주되었다.

이같은 곡 선정은 이 콘서트의 처음과 끝을 하나의 민족, 한(조선)민족의 노래 「아리랑」으로 장식하겠다는 의도에서였음은 물론이다.

 

 

나는 고도로 양식화시켜, 일본인이 세계에 자랑거리로 내놓은 문화상품 노(*能: 일본 전통 가면극), 가부키(*歌舞伎 일본 전통 가무극), 분라쿠(*文樂: 일본 전통인형극) 등 전통 공연물과 일본 현대연극은 가능한한 모두 관람했다.

그러나 대사가 없는 '부토'같은 무용극을 빼고는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언어의 장벽이 크게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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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能) :

지배계급이 즐기던 무대예술이자 종교적 의식의 일환으로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 세계와 심도 깊은 미의식을 그려낸다고 알려져 있다. 노의 탄생 시기는 7세기 나라(奈郞) 시대다. 유랑 예능집단 공연의 하나인 사루가쿠(猿樂)로 행해져 오다가 14세기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연극적 요소와 종교성이 가미돼 지금과 같은 형식을 갖추었다. 이후 막부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무사계급을 중심으로 사랑받으며 일본 문화 깊숙이 뿌리내렸다. 노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시공을 초월해 같이 등장한다. 신, 남성과 여성, 귀신이 출현해 인간의 고뇌와 영혼의 세계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게 주조를 이룬다. 복잡다단한 인간사와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장중한 음악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현악기와 관악기의 연주에 맞춰 매우 절제된 동작과 긴 대사, 숨 막힐 듯 느린 동작의 춤과 연기를 선보인다. 일부 배역은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를 한다. 무대는 장식이나 전환이 거의 없다. 현재, 노의 레퍼토리는 수백 편이 존재하지만 형식이 고정돼 진행 순서는 대동소이하다. 대사가 일본 고어(古語)이기에 내용 이해보다 화려한 의상, 우아한 율동미와 양식미를 음미하는 편이 좋다.노는 전용 극장인 노가쿠도(能樂堂)에서 전문 배우인 노가쿠시(能樂師)에 의해 무대에 올려진다. 도쿄, 오사카, 교토 등 대도시에는 대부분 노가쿠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일부 신사(神社)는 경내에 노가쿠도를 세워 노 공연을 공양물로 신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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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부키(歌舞伎) :

춤과 노래와 대사가 어우러진 공연이다. 남자 배우들이 얼굴에 하얗게 분을 바르고 나와 리듬감 넘치는 연기로 극을 이끌어간다. 일본 서민들과 도시 상공인들의 대중적인 오락물로 지배계급 취향의 노 공연과 대비된다. 노에 이어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가부키는 17세기 초 여성들이 집단으로 춤을 추는 유녀(遊女) 가부키로 시작됐다. 하지만 여류 공연단이 매춘 등으로 풍속을 해치자 막부에 의해 금지된다. 이후 여성 대신 미소년들의 와카슈(若衆) 가부키가 유행했으나 이 또한 남색과 관련되면서 다시 금지령이 내려진다. 성인 남자로만 구성되고 연극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야로우(野郞) 가부키는 17세기 중반 등장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현재 고전 레퍼토리 이외에 창작 가부키, 셰익스피어 작품으로 만든 번안 가부키, 스펙터클한 무대 메커니즘을 활용한 슈퍼 가부키 등 다양한 형태의 가부키가 공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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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라쿠(文樂) :

세계 최초로 어른을 위해 만들어진 인형극이라 할 수 있다. 메이지(明治) 시대 이전까지는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라고 했는데 메이지 이후 분라쿠(文樂)로 정식호칭이 정해졌다. 의리와 인정,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남녀를 묘사하는 이 연극은 3명이 인형을 능숙하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인형의 움직임이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아 관객의 감정 이입을 자아낸다. 모두 남성에 의해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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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내에서 무용극 ‘사도세자’를 발표했던 김일옥(창작 무용가)과 함께 전위극단 ‘니혼 이신하(日本維新派 대표: 마츠모토 유우키치(松本雄吉)’의 멤버들과 어울렸다. '니혼 이신하'는 주로 장대한 스케일의 야외극을 만든 극단이다.

 

 

 

 

 

 

 

1986년도 초, 경향신문 신춘문예 상에 내 희곡 <사진작가>가 당선되었다.

 

그동안 한국에서부터 틈틈이 써왔던 원고를 더 손질해 경향신문에 응모한 것이 뽑힌 것이다.

모노드라마인데, 사진작가의 시대적 고민 등을 묘사한 내용으로, 심사위원 오태석 선생은 한 인물이 끌고가는 끈질긴 힘에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다며 칭찬해 주셨다.

 

시상식에는 나 대신 김혜련(음악가) 선배가 대리인으로 가주었다.

 

연극배우에서 나는 이제 희곡작가가 된 것이다.

 

[강철진:

(불현듯이 비장한 각오로) 나는 사진을 안할 겁니다. (더 큰소리로) 못해요. 나 자신 하나도 제대로 사랑치 못하는 주제에 내가 감히 누구를 찍을 수가 있겠느냔 말입니다. (흐느껴 운다) 나같이 단순하지 못한 사람은 찍을 자격이 없어요. 나영씨! 이 시대에 내가 사진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 역사가... 일어난 사실, 그 모두를 기록할 수 없듯, 사진 역시 그 모든 것을 책임질 수가 없어요..]

 

내가 쓴 이 희곡은 1986년 12월3일~31일까지 <극단 76>에 의해 ‘극단76극장 10주년기념제 종합워크숍 공연’의 첫작품으로 선정,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연출:기국서 출연:박동과 신순화)로 공연되었다.

<극단 76> 의 멤버는 기국서와 기주봉 형제, 그리고 송승환, 강남길 등이다.

 

요새같아선 이멜로 오고갔을 테지만, 그 때 나는 공연 팜플렛에 게재될 작가노트 글을 우체국에 가서 국제우편을 이용해야 했다.

 

[ -공연에 부치어

모두가 건강하시겠지요. 저 역시 가깝고도 머언 이웃나라 일본 땅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앙징스러우리만큼 밝고 명랑한 자기의 감정표현에 있어 세련을 지나치게 구사할 줄 아는, 이들의 언어생활, 수업시간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교실 문턱을 밟아들어 넘어선 순간을 출석으로 인정하는 사고방식들---에 아직도 젖어들지 못하고 있음은 그것들에 대한 매스꺼움일른지요!

저의 작품이 공연되어 진다니 기쁘군요. 저의 집 근처에는 기묘하게도 무궁화가 만발해 있어 저를 평안하게 합니다. 그 조금 앞에는 담을 뛰어넘은 높이의 이곳 특유의 봉선화가 잎사귀 만을 피운 채 무성히 서 있고요...

다음 작품을 완성시키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바지런하기 짝이 없는 이곳 리듬에 따라가다 지쳐버린 저에게는 속히 굴비와 김치찌개의 섭취가 필요할 것 같군요.

보잘 것 없는 저의 작품 ‘사진작가’를 선택해주신 기국서, 76단원들게 감사드립니다. 멀리서 분투를 빕니다. 86.11.9 일본 오사카에서 ]

 

 

일본어 학교를 졸업하고, 나어린 일본학생들과 함께 4년 동안 오사카 예술대학 무대예술학과(전공: 연극연출)에서 본격적인 연극공부를 했다. 내게 꼭 학구열이 있었다기보담은 타국 일본에서 연극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학생신분이란 것이 인맥 만들기에 가장 편했기 때문이다.

이 대학 사진학과 서양학화과에는 한국유학생들이 몇 있었는데, 최광호(사진가)와 황선구(서울예대 사진과 교수), 안영찬(서양화가)가 그들이다.

 

 

          '오사카 예술대학' 사진학과 유학생들과

 

 

           ' 오사카 예술대학' 한국유학생 친선 축구대회를 끝내고

 

 

 

                              작: 황선구 'Stone, Beyond the Wall'

 

 

 

                          작: 최광호 '가족'

 

 

                                            작: 안영찬 '심호흡(Deep breath)'

 

 

 

 

 

                                           내가 좋아하는 가객(歌客) 김수철과. 최광호 사진전시장에서

                                                     

 

 

        오사카 예술대학(무대예술학과) 졸업작품 '한여름 밤의 꿈'(세익스피어) 공연을 마치고

 

 

내 나이, 29세였다.

 

어느덧 나는 많이 변해있었다.

일본어가 귀에 쏙쏙 들어왔고 꿈도 일본어로 꾸게 되었다.

 

그리고 나만의 처세술이라는 것도 터득해 놓았다.

터득함이라는 건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인처럼‘인 거다.

일본인이 1번 웃을 때, 나는 2번을 웃어보이는 것! 그런 노력들을 했다.

 

나의 감성도 많이 변했는 지, 가끔 한국에 나올 때면, 일본사람 다 된 것같다는 말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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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연극이 국내 연극계에 전혀 소개되어 있지않은 현실에 대해 안타깝게 바라만 보고 있다가 나는 결심을 했다.

몇 년 동안의 고생을 한 끝에 번역집 <현대일본희곡 10선(예술기획)을 펴낸 것.

개인적으로는 일본어를 좀더 구체적으로 공부하려는 속내가 있었다.

 

그러나, 번역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재창조와 가까운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창작보다 더 어려웠다.

특히 처음 소개되는 일본희곡 쟝르인데다가, 나름 원작자의 의도를 가능한한 훼손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세워두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木下順.二(기노시다 준지), 寺山修司(테라야마 슈우지), 井上ひさし(이노우에 히사시), 오타 쇼오고(太田省吾), 가와무라 다케시(川村  ? ) 등 작가의 작품의 번역했는데, 모두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희곡들이다.

 

일단 1945년 즉 일본의 패전 이후부터 '소극장 운동'이 시작된 1960년대를 거쳐서 '프로듀서 공연'이라는 새로운 향방이 모색된 1980년대까지를 현대로 가름하여, 그 간에 실제로 일본의 연극계를 리더해 왔다고 볼 수 있는 희곡들을 걸러내었다.

--최근 작품을 선정하는 데에는 극단과 프로듀서(도쿄 한 곳만 하더라도 이들을 합친 수는 1000개가 넘는다.) 에 의해 빈번히 전개되고 있는 수많은 연극무대 가운데에서 과연 어떤 무대를 일본을 대표하는 최신작으로 꼽을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문학성다는 공동 작업 즉 배우 중심적 성향이 두드러져 있는 최근의 무대 현실 등을 감안해 볼 때, 문학성 연극성 흥생성이 높은 희곡들을 골고루 갖춰서 선정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인 관객 또는 한국인의 감성 측면에서 작품의 소화여부를 고려했고, 일본의 색채가 짙은 작품 이외에도 앞으로 한국 연극발전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택했다.

또, 낯선 쟝르 일본희곡이니 만큼 가능한 한, (번역방식은) 일본인들의 감각을 그대로 살려서 전달코자 했다.

 

국내인들에게 일본 현대연극과 희곡에의 이해/접근을 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진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었다.

(번역 과정에서는 오래된 일본어에 능통하신 아버님과 일본출판사에서 일하는 강희지의 도움을 받았고, 표지 디자인은 오야마 타다시(후쿠오카福岡거주 일본 화가)가 제작해 주었다.

 

 

서울에 들어와서 번역 출판 관련해 기자와 인터뷰 때의 일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골치아픈 일을 하고 있는 거냐?”

“내가 이런 기사를 쓰게 되면, 아무래도 독자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거 같다.”

며 며 되려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한국일보 문화부 담당기자였다.

 

그 때가 1990년도 초반이었는데, 일본문화가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으나 내심 속상함은 어디다가 지워버릴 길이 없었다. 소위 ‘기자’라고 하는 지성인이 그런 말을 내게 쉽사리 뺃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지 않았다.

 

일본내에 '한국전문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웬만한 한국인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주준이란 정말 전문가의 것을 능가한다.

심지어는 한반도 팔도강산의 소울음 소리를 지역별로 분류해 놓은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 한국을 그다지 잘 알지못한다."며 겸손을 떤다. 

 

한국내에 '일본전문가'는 많다.

그러나 '나는 일본을 이렇게 잘 안다'며 허풍을 떠는 이는 많아도 그들의 정보수준을 들여다보면 너무 얕아서 일본인을 놀래키기에는 먼 수준이다.

     

 

<번역도서> 현대일본희곡 10선

 

1집: 1986년 오타 쇼오고(太田省吾) 작 <화살표>

       1989년 가와무라 다케시(川村  ? ) 작 <보디워즈>

       1989년 기타무라 소우(北村 想) 작 <에리코를 위하여>

 

2집: 1949년 기노시다 준지(木下順二) 작 <유즈루(夕鶴 저녁두루미)> 

       1970년 이노우에 히사시(井上ひさし) 작 <똥과 글의 상봉>

       1978년 테라야마 슈우지(寺山修司) 작  <노비훈>

 

3집: 1969년 가라주로 (唐 十郞) 작 <소녀가면>

       1978년 베츠야쿠 미노루(別役 實) 작 <서쪽을 향한 사무라이>

       1964년 미야모토 켄(宮本 硏) 작 <비행사>

 

 

1집은 1991년에 2집은 1995년에 '예술기획'에서 간행했으나, 여러 사정상 3집은 펴지못했다.

가능하다면 이제 나머지 일은 후학들께 물려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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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무라 다케시(川村  ? ) 작/연출 '보디워즈'

 

 

다음은 내가 번역한 일본희곡 가운데 가와무라 다케시(川村 ***  )가 운하를 야외무대로 삼아 공연했던 장대한 역사극 '보디 워즈' 내용이다. 이 작품은 젊은 층에게 인기 높았던 무대였다.

 

일본 자본주의 공화국 연방의 수도, 에이지아.

인간과 새로 탄생된 인조인간 사이의 민족저항이 끊이지 않고, 도시는 황폐하기 이를데 없다.

운하 위에는 순찰선이 교차되어 지나가고 인간이 버린 애완동물인 악어(연기자가 조종)가 거대하게 성장하여 헤엄을 치고 있다.

인조인간을 대표하는 여성대통령 후보가 당선되는 찰라 인조인간의 말살을 명령한다. 이 무슨 배신인가!

그러나 인조인간은 전에의 기억을 지우고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재생되어진다.

 

죽은 동료가 똑같은 모습을 한 다른 존재가 되어 다시 태어난다는 간이 써늘해지는 이야기로 인간에게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공포를 육박시키는 허무적인 스토리이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악몽과 같은 역사로부터 눈을 뜰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연극 '보디 워즈'는 1988년 7월 말 요코하마 JR화물 히가시다카(東高) 역 구내에서 공연되었다.

강 위에는 이제 쓸모없게 된 몇 척의 배가 버려져서 떠있고 연기자들은 배위, 강 건너편 육지에서 그리고 강 위로 뛰어들기도 하며 움직인다. 관객은 지붕이 있는 육지 돗자리에 앉아 이러한 광경들을 바라보는 형태가 된다.

즉 공간의 매력과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극세계가 훌륭하게 엇갈린 예라 할 수 있다.

2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요코하마 항의 안쪽 구석에 위치한 이 역까지 짐을 내리는 등, 활기에 찬 장소였다.

그것이 항구의 정비, 저장고의 건설, 콘테이너의 출현에 의해 점차로 거룻배는 운하로부터 모습이 사라지고 역을 녹슬어 있었다고 한다.

이 연극의 무대는 지금까지도 운하의 중앙에 떠있는 잊혀진 장소, 거룻배의 갑판이며, 객석은 폐선(廢線)이 되어버린 레일의 옆공간, 짐을 싣고내리는 작업장인 것이다.

 

똑같은 일들을 반복해 갈 인간의 어리석음이 적막한 밤광경과 겹쳐져 슬픔을 안겨주었으나, 어리석은 인간에 의해 버려지고 망각되어진 그 장소가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으며, 이 폐허의 역에는 그렇게 느끼기에 충분한 정묘(精妙)한 빛이 있었다. 

 

이 작품에 대해 연출가 가와무라 다케시는

 

"지금까지는 파괴의 생성력(生成力)을 써왔다. 그것들은 부모와 자식이라고 하는 관계에서 자식의 입장, 즉 테러리스트 쪽이었으나, 이번의 테마 역시도 인간의 역사다. 시정자(施政者)의 손에 당하고야 마는 악몽과 같은 역사의 전말(顚末)이다."

 

 

이후, 나는 극단 '세이넨단(靑年團)'의 <도쿄노트><작. 연출: 平田オリザ (히라다 오리쟈)>의 일어자막 번역 일을 했는데, 이 공연은 1999년 10월 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상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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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에리코를 위하여'를 쓴 작가 기타무라 소우(北村 想)는 내 책에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넣어주었다.

 

[ 미지의 한국인 독자와 연극인 여러분께

 

이 작품은 70년대의 제 고교시절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탐정극입니다.

저는 여러 종류의 희곡을 쓰고 있습니다.

한 가지 색에 물들어지는 일, 어떠한 경향에 얽매이는 일을 싫어하는 작가이므로, 제게 기대를 갖고있는 관객을 배신이라도 하듯, 성격이 각기 다른 연극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답니다.

 

'에리코를 위하여'는 비교적 줄거리성을 가지고 있는 오소독스한 연극입니다.

거기에는 에리코를 대하는 개인의 환상들이 묻혀있습니다.

그 때는 일본의 70년대라고 하는 정치적으로도 혼란한 시대였으므로 개개인이 어떠한 환상을 쫓으며 살았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즈음 한국내 학생운동을 TV에서 대하고 있노라면 저는 일본의 70년대가 되살아 오는 것같은 착각을 합니다.

저 역시 기동대의 방패에 둘러싸여 헬멧을 쓰고 데모에 참가한 적이 있어서이지요.

그때는 뜨거운 시대였답니다.

무언가 강렬한 환상을 안고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그 20년의 시간을 거리에 두고 '에리코를 위하여'가 여러분의 가슴에 어떤 모습으로 심어질 것인가, 저는 마치 어떤 특권을 손에 넣기라도 한 양 황홀감과 일말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제겐 연극이라고 하는 표현의 현장 만이 남아있습니다.

연극은 아무래도 싸움같습니다.

정황(情況)과의 맹렬하고도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그러므로 연극은 약한 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번 한국어 번역에 대해서는 그저 감사와 분에 넘치는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건승을 빌겠습니다. 1991. 5.27 기타무라 소우  ]

 

 

                 기타무라 소우와 역자, 김경원

 

 

     오타 쇼오고(太田省吾) 작/연출 '바람 정거장'

 

 

 

                                             좌로부터 역자(김경원) 오타쇼오고, 이윤택(연출자)

 

 

 

출처 : 은행나무아래 커피향
글쓴이 : 퐁당수(김경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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