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감상/발탈

0세부터 100세까지 즐거운 '발탈'

퐁당퐁당 당수 2020. 5. 14. 10:52


     

   


'발탈'과 어릿광대

 

 

꿈이로다 꿈이로다

꿈에나서 꿈에가고 꿈에 죽는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아이고데고 성화가 났네. 에헤~~

 

 

 

                                                                                   유인촌(전 문화부 장관)과 글쓴이

 

 

1978년 나는 ‘민속연희’(극단 '거론' 산하)에서 김응수(=김수남. 현, 청주대 공연영상학부 교수) 등과 함께 전통민속극 ‘발탈’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극단 ‘거론’은 배우 유인촌과 이춘연(영화제작자, 기획시대 대표), 최규호(판토마임이스트) 등이 몸 담았던 곳이다.

 

이동안 옹(발탈 기능 보유자. 1900.12.6 경기도 화성출생)이 발탈을 마지막으로 공연한 때는 1961년이었다.

 

<화성여성연예단>의 진주공연이 마지막 공연이었는데 그 이후는 공연이라기보다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단편적으로 보여주는게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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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쳐지는 부분 체크/정리 요



0세부터 100세까지 즐거운 발탈

                                                             

: 김경원(무형문화재 제79발탈초대전수자, 제천시 동아리 창작발탈회장)

 

발탈(국가주요무형문화재 79)’은 한쪽 발에 탈을 씌워 노는 우리의 전통연희극이다.

 

이 놀이는 양반들에게 엿 먹으라는 듯 발바닥을 내밀어, 그들로부터 받았던 고통과 멸시, 그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보냈던 우리 조상들의 통쾌한 연희 형태이다.

사라져 가던 발탈을 돌아가신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그 기능을 보유하신 분을 찾아 전수받아 19797월 서울 종로구 원서동 비원 앞에 있는 공간사랑에서 발탈첫 발표 공연을 했다.

 

그 전 해인 1978, 대전에 살고 계셨던 이동안 옹을 서울 신당동 허름한 건물 2층으로 모셔와 그 분으로부터 우리 춤인 승무와 살풀이를 배웠으며 발탈의 연희과정과 대사를 녹취, 대본으로 정리, 발탈의 모든 연희과정을 전수받았던 것이다.

 

6차례에 걸친 수정 및 보완 작업을 거친 끝에 드디어 50분 짜리의 원형에 가까운 대본 -현 무형문화재 제79발탈대본-을 완성시켰으며 드디어 1979728~29공간사랑에서 4회에 걸쳐 발탈’ (내가 알기론 세계 유일무이한 발인형극) 전수한 복원 발표 공연을 했는데...

 

당시 공간사랑소극장에는 국내인보다는 외국 관객들이 더 많이 와서 큰 호응을 해주었다. 코리언 헤럴드 코리안 타임지를 비롯한 국내에 있는 각 신문, 연세대 영자 신문 Annals 등에서 이 공연을 기사로 다뤄주었고 영사관과 대사관, 서울시내 호텔 등에 전단으로 홍보를 했던 덕으로 성황리에 끝낼 수 있었다.

 

이 공연은 김용배,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의 우리 민속놀이 '사물놀이패 창립 발표, 1인 창무극 '공옥진 병신춤과 함께 시리즈로 소개된 무대이다.

 

공연대본과 사진자료들은 두 민속학자, 심우성 정병호에게 건네졌으며 그 자료들을 토대로 발탈은 이윽고 국가무형문화재 제79로 등록이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만인 201976, 제천시 화산동 여성문화센터에서 창작발탈 시조창이 머시여?’를 선보이기에 이르렀으며, 이 전통놀이는 푸른달 작은도서관’(관장: 이의희)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여름방학 특별수업의 컨텐츠로 채택되었다.

 

나는 왜 40년 만에 발탈을 꺼내들었을까? 한국과 일본에서 연극과 영화 배우로, 극작가로, 연출자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지난 세월 속에서 내게는 뭔가 채워지지 않았던 정신적인 허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21세기인 현대에 조선 후기의 놀이 양식을 되풀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창작 발탈이다.’

 

나는 이 창작발탈놀이 덕분에 여름 무더위을 잊은 채, 맑고 밝은 에너지를 지닌 제천의 초등학생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여러 다양한 생각이 많고 많은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니, 학생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

 

각자 스스로의 얼굴을 닮은 탈을 만들기로 했는데, 해바라기, 햇님슬픈 광대 등 여러 얼굴들이 나왔다.

 

갑자기 한 학생이 구석에 놓여있던 북을 가져와 신나게 때리더니, 한 학생은 두 손목에 색동한삼을 끼고, 훨훨 춤을 춘다.

 

그리고 만든 탈을 발에 끼우고 어릿광대와 대사를 나눈다.

 

발탈 관객이 많이 오셨냐?

어릿광대 : (부채를 펴며) 그래. 손님이 많이 오셨으니 어서 인사를 여쭈어라....

 

수업시간 내내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 행복바이러스가 넘쳐 흐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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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문화재 당국의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비지정문화재들이 당시에는 많았는데, 이 ‘발탈’은 연극적 요소가 꽤 많이 들어있다.

 

나는 사멸 상태에 있던 ‘발탈’을 이동안 옹으로부터 녹취/정리해서 형태가 있는 대본을 만들어 발탈의 연희를 전수받았다.

 

대전에 살고 계시던 이동안 옹을 극단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서울 신당동(중앙시장)에 있는 건물 2층으로 모셔왔고, 이 분의 발탈 연희극 그러니까 연희과정과 대사를 녹취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는 15분 정도 전해내려오던 연희의 완벽한 대본 제작을 위해 이옹의 기억을 되살려내야 했다.

 

녹취할 때 마다 매번 달라서 애를 먹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발탈'은 원래 대본이랄 것이 없는 즉흥적 연희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기록자의 창작이 가미될 수 밖에 없다.)

 

약 1년 가량, 녹음기를 통해 옹의 대사를 녹취하며 대본채취 작업을 했는데, 6차례에 걸친 수정/보완 작업을 거쳐 드디어 50분 짜리의 원형대본(현재 무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어 있음)을 완성시켰다.

거기에는 내가 창작해낸 대사들이 꽤 들어가 있다.

 

비로소 이동안 옹의 ‘발탈’ 연희 원형의 기틀을 보완해 낸 것.

 

'발탈'이란 놀이는 양반(관객)들에게 자신의 발바닥을 내밀어, 그들로부터 받았던 서럽고도 한스러운 마음, 그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리는 서민층 그들의 생활장치였다.

 

1979년 7월28일~29일, 원서동 비원 앞에 있는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민속연희 발탈보존회 명으로 조상들의 애환이 담긴 (세계적으로) 유일한 발인형극 형식의 ‘발탈’ 을 전수, 복원 발표(총4회) 공연을 해냈다.

 

공간사랑 소극장에는 국내인보다는 외국 손님들이 더 많이 와서 큰 호응을 해주었다. 헤럴드와 타임즈를 비롯한 국내에 있는 각 신문, 연세대 Annals 등에서 이 공연을 특집 박스 기사로 다뤄주었고 영사관과 대사관, 서울시내 호텔 등에 전단으로 홍보를 했던 덕으로 아주 성황리에 끝낼 수 있었다.

 

이 무대에서 나는 어릿광대 역을 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이 공연이 이루어진 데에는 신찬균(문화재 전문위원), 심우성(한국민속극 연구소장) 선생의 도움이 있었다.

 

이 '발탈'공연은 '사물놀이 패(젊은 타악가 김용배,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의 창립 발표, '공옥진 병신춤(1인 창무극)'과 함께 이곳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였었는데, 이러한 문화공연은 '국내 문화기획자 1호' 강준혁(전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장. 2014 死)의 기획으로 이뤄진 것이다. 

강준혁은 77년 건축가 김수근의 권유로 소극장 공간사랑 극장장을 맡은 이래 공연기획자의 길을 개척했는데, 공간사랑 시절 10년 동안 그는 위 공연 외에도 김숙자 살풀이춤, 이매방 승무 등 우리 전통 공연문화를 발굴해내 새로운 조명을 받게 했다.

 

 

* 공간사랑:

비원 옆 '공간 사옥' 지하에 있는 소극장.

가로 9미터, 세로 12미터의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관객 250명까지 수용가능함.

현대예술사의 한 족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백남준(미디어 아티스트) 김중만(사진작가) 등도 이곳에서 강연했으며, 시낭송, 현대음악, 현대무용, 전통굿까지 다양한 장르가 공연되었던 '융복합적' 창조공간.

 

 

‘발탈’은 특별한 주제나 사회의식을 다루기보다는 한국적 서민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표현해 보이는 것이 내용이다.

당시 서민들의 관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학문적 가치도 지니고 있는데다가 백제시대 진중놀이에서부터 고려와 이조시대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그때 그때의 생활상을 뒤섞어 이루어졌기에 연희는 재미를 더한다.

지난 해(2013)에 먹방(자기가 밥 먹는 모습을 방송으로 보여주는)이 유행, 화제였는데, '발탈'의 내용도 바로 이런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발탈을 배우는 동안 틈틈이 이동안 옹으로부터 <승무>와 <살풀이> 춤을 전수받았다.

이동안 옹의 말에 의하면 이매방(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보유자) 선생이 소년시절이었을 적에 자신으로부터 춤을 배웠다고 했다.

 

 

 

 

 

 

 

 

 

 

 

   * 전통극 <발탈> 전수 발표공연. 어릿광대 역을 하고 있는 글쓴이

 

 

 

착한 김 응수와 김 경원(극단 거론의 발탈 공연) -이보형

 

극단 거론은 지난 칠월 스무닷샛날에 공간 사랑 소극장에서 흔히 알려진 전통 민속극이 아닌 발탈이라는 색다른 탈놀이를 들고 나왔다.

발탈은 다른 탈놀이처럼 얼굴에 탈을 쓰는 것이 아니고 발바닥에 탈을 끼워놓고 누워서 공연하는,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아주 낯선 탈놀이이다. 그들이 구태여 발탈을 가려 가지고 나온 것은 그들이 밝힌대로 “비지정 문화재 중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직접 전수받아 보존한다.”는 사명감에서였겠지만 발탈이 다른 탈놀이에 견주어 특이한 공연 방식을 취하면서도 세상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놀이라는 것 곧 희소가치가 있는 것을 해냄으로써 상대적으로 빛을 내겠다는 뜻도 있었겠다.

발탈은 문헌에도 나와있지 않고 또 놀 줄 아는 이도 드물다.

몇해 전에 이 동안이 발탈로 판을 벌이기 전까지 내가 발탈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은 네 경우뿐이었다.

첫째는 박녹주와 같은 판소리 명창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일본 제국주의 때에 협률사나 광무대와 같은 전통 연예 공연에서 판소리, 줄타기 및 땅재주 명인들에 끼어 경기 소리 명창이며 재담 잘하던 박 춘재가 공연 막간에 발탈을 놀았다는 것이다.

둘재는 이 창배와 같은 경기 소리 명창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경기 소리 명창이며 재담꾼인 박 춘재가 발탈을 놀았고 그의 제자인 박천복이 이것을 배워서 한동안 잘 놀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꼭두각시 놀이꾼인 남 형우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자기가 발탈을 잘 안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줄꾼인 이 동안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자기도 발탈을 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만큼 발탈에 대하여 아는 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소리명창들의 이야기로는 발탈에 색다른 재담이나 소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 세상에 흔히 있던 재담과 남도 소리로 엮었던 것이었으니 따로 발탈을 배우고 자실 것도 없는 것이며 아무나 재담 잘하고 소리 잘하는 이는 발탈 노는 것을 몇 번 눈여겨 보면 익힐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줄꾼이고 춤꾼인 이 동안이 박 춘재가 노는 것을 몇 번 보고 그것을 익혀 그 나름대로 판을 짰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도 이 동안이 박 춘재가 놀았던 그대로 판을 짜서 논다고 볼 수는 없었다. 또 꼭 그렇게 놀 필요도 없는 것이 민속극이다. 박 춘재가 [고고천변]과 같이 남도 소리를 놀았는데 이 동안은 경서도 소리며 [쑥대머리]며 심지어 [처녀 총각]과 같이 그때 유행하던 유행가까지 끼어 넣어 판을 짰다고 해서 이 동안이 노는 것은 발탈이 아니라든지 엉터리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본디 민속극은 놀이꾼마다 어느 정도 그때그때 제 장기대로 변동하여 노는 것이 라는 것을 안다면 이런 탈이 나올 수가 없다고 본다. 그보다 큰 문제는 소리나 재담이나 춤의 솜씨가 어떻게 닦여져 어떻게 놀이를 이끌어 가느냐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번 공연에서 탈꾼 노릇은 김 응수가 해냈고, 이릿광대 노릇은 김 경원이 해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들의 솜씨도 요새 젊은이들이 전통적인 놀이판에서 흔히 하는 솜씨의 테두리를 벗지 못하고 있다. 내가 전통 민속극 이야기만 나오면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판놀음의 노릇바치라는 것이 재담 솜씨, 소리 솜씨, 춤 솜씨가 모두 뛰어나야 하는 것이며 이런 것으로 판을 휘어잡지 못하면 노릇바치로서의 구실이 끝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솜씨는 하루 이틀에 익혀지는 것이 아니고 어려서부터 배우고 닦아야 되는 것이니 이제 뼈마디가 다 쇠어버린 젊은이들이 새삼스럽게 배운 솜씨라는 것이 어느 테두리를 벗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옛 재담과 소리와 춤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대부분의 젊은 구경꾼들은 그저 우리 할아버지들이 즐기던 놀이이니 마땅히 즐겨야겠다는 뜻이 앞서서 덩달아 추임새를 하는 것이지만 옛날 놀이의 속을 알고 또 이것을 익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 지긋한 이들은 그 어려운 학습을 그만큼이라도 해낸 것이 기특하여 추임새를 푸지게 해 준 것이다.

첫머리에는 삼현육각이 울리고 어릿광대가 삼현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삼현육각이란 피리 둘, 젓대, 해금, 장고, 북으로 편성되는 것이지만 젓대잡이는 없고 웬 가야금잡이, 아쟁잡이가 끼어 이상하게 되었다. 편성은 원칙에서 벗어나 입맛이 개운치 않았으나 그들의 삼현 치는 솜씨는 제대로 되었었다. 춤꾼이 아닌 김 경원의 삼현 춤 솜씨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춤꾼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흉내라도 잘 냈던 것은 그의 몸매나 체질이, 이른바 ‘춤집’이 좋은 덕을 본 것이다.

이어서 탈꾼과 어릿광대가 탈의 얼굴 모양새에 대한 재담을 주고 받았는데 내가 먼저 느낀 것은 그들이 모두 서양 연극 배우로서 재질은 있다고 하겠지만 재담꾼으로 재질을 썩 잘 타고났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김 응수의 재담은 뻣뻣했고 싱거웠고 설어 있었고, 김 경원의 재담은 애써 재담같이 해보려는 어색함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재담하는 솜씨로 말할 것 같으면 설고 어색한 것이 어찌 김 응수와 김 경원뿐이겠는가, 요새 젊은이들의 재담이 다 그렇지. 이동안도 이름난 줄꾼이고 춤꾼이지 뛰어난 재담꾼은 아니다. 김 경원은 우리 전통 놀이의 재담을 요새 배우나 탈렌트들이 흉내내는 재담아닌 재담과 혼동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 경원의 어릿광대짓이 꼭 요새 배우나 탈렌트들이 해내는 화인 또는 아전 노릇하는 짓거리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짓거리에 나타나는 재담은 전통 놀이에서 하는 재담과 차이가 있는 것인데, 요새 연극에서 이런 짓거리가 어떻게 판에 박힌 듯한 것으로 굳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이어서 김 응수가 [만고강산] [쑥대머리] [옥중상봉]같은 단가와 판소리 몇 대목을 했다.

김 응수의 소리에 김 경원은 끊임없이 추임새를 하거나 소리를 따라서 하거나 소리에 나타나는 몸짓으로 그리려고 애를 썼다. 소리는 탈꾼이 하는 것이니 어릿광대가 초초해할 것이 없이 드문드문 추임새나 하고 느긋하게 있다가 결정적인 때에 구성진 몸짓으로 구경꾼을 웃기거나 하면 제 구실을 다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김 응수가 소리 비빔을 했다. [박연폭포] [신고산 타령] [오봉산 타령]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둥가 타령] [처녀 총각] [흥 타령] [담바귀 타령] 따위로 여러 소리로 짜여지는 소리 잡탕은 좀더 흥겨운 것이었다. 이 소리들은 김 응수도 제법 부를 줄 알았고 구경꾼들도 잘 아는 소리이기 때문에 제법 흥이 났던지 여기저기서 지수는 소리가 나왔다. 이와 같이 여러 잡소리를 줄줄이 엮는 것을 소리 비빔밥이라고 부른다. 숨쉴 틈 없이 주서 섬기며 소리 중등을 뚝뚝 잘라먹고 엉뚱하게 이 소리 저 소리로 넘어가고 하여 구경꾼을 웃겼더라면 더 제 맛이 났을 것이다.

다음에 나온 병신춤이나 먹기 재담, 조기 세기 재담, 여자 희롱 재담은 본디 발탈에서 노른자위로 꼽히는 재담들이다. 이때는 김 응수나 김 경원도 한참 신명이 나서 판이 가장 푸짐하게 어울린 셈이었다. 용산 삼개가 지금은 배 하나 닿지 않는 강변이 되어 요새 사람들은 조기 세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그저 그런 건가 보다 하겠지만 옛날 삼개 뱃사람들이 드렁조로 [조기 타령]하는 것은 특이한 소리로 이름났기 때문에 발탈 놀이꾼이 이것을 근사하게 흉내내는 데서 갈채를 받았던 것이다. 김 응수도 이대목은 제법 해낸 셈이었다.

끄트머리에는 [약타령] [고사 소리] [파언곡]으로 내리 줄소리를 했다. 소리꾼이 아닌 김 응수로서는 이것이 가장 힘에 겨운 대목이었을 것이다. [고사 소리]라는 것이 옛날 홍패고사(*紅牌告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는 붉은 증서를 맞들어 놓고 부귀를 누리라는 뜻으로 지내는 고사)나 성주 고사와 같은 큰 고사에서나 소리 광대가 부르던 것이었다. [고사 소리]라는 것이 신세풀이, 집짓기, 지경 닫는 소리, 비단 타령, 액맥이 따위의 여러 소리가 중중모리 자진모리 같은 여러 장단에 패개성음이라는 소리조로 엮어나가는 것인데 이것이 보통 소리 솜씨로는 제대로 부르기가 어렵다. 소리꾼이 아닌 김 응수에게서 이렇게 어려운 성음과 부침새가 맞아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소리속을 아는 이들은 소리꾼이 아닌 그가 그 어려운 소리를 그만큼이라도 이끌어 나가게끔 닦은 공력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탈놀이 노릇을 해낸 김 응수나 이릿광대를 해낸 김 경원이나 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고 그들에게 끝없는 추임새를 보내고 싶다. 놀이꾼이 아니면서 별로 알려지지 않고 또 해보았자 별로 빛이 나는 것도 없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우리 전통 탈놀이를 몸소 전수하겠다고 나서서 고생을 하며 이만큼이나마 이끌어 나갔던 마음가짐이 고맙다. (문화재 전문위원)

- 이상, 뿌리깊은 나무 (1979. 8월호)에서

 

 

 

 

  1979년 <발탈>(중요 무형문화재 제79호)의 첫선을 보이고 있는 김경원 

 

 

 

 

 

 

 

 

 

 

 

 

1979년 10월13일 자, 신아일보의 기사(글: 신영철)

 

민속연희 발탈보존회

-세계적으로 유일한 발인형극 형식 조상들의 애환담긴 <민속연희>의 복원

발탈꾼 이동안(李東安)옹의 소원을 풀어준 민속연희 (발탈)의 복원 전수자 김응수(金應秀, 본명:김수남)와 김경원(金京媛)

 

경기 화성 재인청의 세습광대의 후예인 이재학(李在學)씨의 외아들로 태어나 남사당패를 따라다니며 줄타기, 땅재주 그리고 <발탈> 등을 익혀 전해온 이동안옹(79년 당시 76세) 그는 요즈음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도 유일하게 보존해 온 <발탈연희>를 전수받고자 찾아 온 두명의 젊은이들이 있어 그들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키우고 있다.

젊은 극단 <거론>대표 김응수씨와 김경원씨 등 두 사람이 전수자 없는 아쉬움 속에서 이 연희를 보존해 온 이옹의 후계자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발탈은 가로 20센티 세로 25센티 정도 크기의 탈을 왼발에 묶어 씌우고 검은 휘장 속에서 발만을 내놓은 채 인형 몸통 위에 올려놓으면 빨간 상투, 검은 수염의 한 광대가 만들어져 어릿광대와 함께 얘기를 주고받으며 춤도 추고 타령도 늘어놓는 독특한 형식의 민속연희다.

<족탈(足탈)>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연희는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할 때 숫자가 적은 백제가 이를 위장하기 위해 군사들의 두 팔과 두 발에 탈을 씌어 한 사람이 마치 5명처럼 보이게 했다는 데서 유래된다. 이것이 서민 생활 속에 연희형태로 파고들면서 재담, 노래, 춤 등을 엮어 서민들의 일상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나온 것이다.

전수자들을 얻은 이옹의 기쁨 감정 또한 깊은 감회에 서려있다.

“15세 때부터 전통무용을 배워 온 내 인생은 60여년 간 나름대로 열심히 제자들을 키워낸다고 했지만 안타까운 건 내 모든 걸 물려받을 제자가 없다는 것이었지. 그 중에서도 특히 <발탈>은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서 내 대에서 끊기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는데 다행히 두 젊은이가 전수를 자청해 와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아”

그는 이번 기회에 김응수씨에겐 병신춤을 김경원씨에겐 자신이 직접 만들어 온 12북 승무를 전수시킬 수 있다는데 보다 흡족함을 표한다.

그리고 지난 7월 28일, 29일 <공간 사랑>에서 전수발표회를 가져 18년간 잊혀졌던 발탈의 무대를 재현했다.

“어흠, 어흠, 손님이 많이 오셨냐?” 탈이 먼저 말을 꺼내면 어릿광대가 말을 이어 받는다.

“그래, 손님이 많이오셨으니 인사를 여쭈어라.”

탈이 고개를 넙죽숙여 인사를 해보이면 광대는

“아따 그놈 인사도 잘도한다. 여봐라, 너를 보려고 오셨으니 춤도 한번 추어봐라.”

이렇게 시작되는 재담은 허튼타령의 만장단에 이어 단가「만고강산」으로 몸을 달궈놓은 뒤 춘향가 중「쑥대머리」로 슬픈 분위기를 잡곤 다시 박연폭포와 신고산타령, 오봉산타령, 진도아리랑 등을 엮은 잡가로 이어진다.

전직이 생선장수인 탈은 이어 흥나는 드렁조로 조기타령을 하고 고사로써 연희의 클라이막스를 이룬후 파연곡으로 관객과 작별한다.

(중략)

사라져가는 우리의 한 민속놀이를 되찾아 보존키 위해서 어려움 속에서도 李옹의 정성어린 가르침과 자기연구를 통해서 발달의 원형을 되살려 낸 金씨. 남장 어릿광대로 탈머리와 대화를 나누며 이 연회를 합께 전수받고 있는 김경원씨 또한 “조상들의 생활을 밝혀주는 흥미있고 독특한 놀이로서 한민족의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를 계승한다.”는 보람에 커다란 만족으로 정열을 다하고 있다.

줄타기의 명인으로도 잘 알려진 이응은 이제 귀한 전수자들을 얻어 또 하나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는셈. 오랫동안 잊혀졌던 <발탈>이 전수발표회를 가졌고 그 발표회의 장면 장면들이 컬러슬라이드에 담겨져 일본에서 열린 세계인형극대회 석상에 소개돼 찬사를 받기도 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치는 장면들은 듣기에도 거북하고 또 이래 저래 우리 것을 잃어가고 있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같은 후계자를 얻을 수 있게 된 건 나로선 더할 수 없는 영광이지. 가르쳐 주고 싶은건 너무 많은데 이 늙은이가 그들의 정열을 얼마나 충족시켜줄 수 있을 지가 의문이야.”

두 젊은 전수자들에게 연희의 심오한 멋과 발놀림, 재담 등을 차근차근 전해주던 이옹은 말은 그렇게 해도 젊은이 못지않은 기예의 정열을 과시하고 있다.

 

 

 

 

 

 

 

 

 

 

 

 

 

 

 

 

 

 

 

<등장인물>탈 어릿광대

<무대설명>무대 중앙에 60센티 높이의 단이 가로 120센티, 세로 150센티로 자리를 잡고, 무대 상수에 삼현육각이 자리잡는다. 어릿광대는 발탈의 앞쪽에 어느 쪽이나 자유스럽게 자리잡는다.

 

 

  

발탈 발표공연이 끝난 후의 일이다.

 

정병호(당시 문화재 전문위원, 중앙대 명예교수. 2011년 故)가 일본에서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내한했는데, 그들이 발탈공연 자료를 원하니 급히 전달해야 한다며 우리가 만든 대본과 공간사랑에서의 공연 슬라이드 원본 등 자료를 달라고 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을 몽땅 정병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정교수는 그 자료들을 곧 돌려주겠다고 하던 말과는 달리 아무런 연락도 주지 않았다.

 

그 후, 우연히 문화부 관계자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이 때 내가 정병호 교수에게 준 자료들을 바탕으로 '발탈‘은 인간문화재 제79호로 지정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채취해 만들었던 발탈 대본(토씨 하나 틀리지않은 그대로)을 정병호 교수 자신이 만든 것처럼 어느 공연팜플렛에 고스란히 기재되어있음을 훗날, 그것도 내가 일본 유학 시절에 접하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 일이었다.

나는 일본땅에서 어느날 한밤중에 불현듯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병호 교수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부당한 사실에 대해 해명하라고 토했다.

나 하나야 그렇다치더라도, 알찬 문화의 씨 하나 제대로 못뿌리고 있는 내 나라의 문화적 토양, 학연과 지연에 가로막혀있는 모순된 사회 속에서 부단히 노력하고 애쓸 후배들의 모습들이 눈 앞에 떠올랐다.

이런 한국사회 현실이 내가 보고사는 일본사회와 자꾸 비교가 되어 속상했다.

 

 

[ (생략)

1979년의 발탈 대본을 정교수님께 전달했던 김경원입니다....

(중략) 만일 문공부 문화재 관리국에 올려졌던 서류에 저희들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한다면, 이제라도 속히 밝혀주시옵고 앞으로도 그 발탈 대본의 소개 또는 인쇄물이 되어 나오는 경우에는 그 대본을 저희가 채록했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히 밝혀주실 것을 독촉드리는 바입니다.

정당한 일에는 정당한 태도로 임하고저 이러한 무례를 무릎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92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

 

정병호 교수로부터 답장의 편지(국제 등기우편)가 일본 집으로 도착했다.

 

[ (생략)

이 옹의 발탈을 내가 인간문화재로 지정했기 때문에 얼마나 조사를 많이 했겠소.

(중략)

사실인즉, 김양의 채록을 고의적으로 도용했다 하면 채록본에 ‘정병호 채록’이라고 쓰는 것을 말하는데, 나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이유는 도용저의도 없었고 이동안 옹의 발탈연희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표준형으로만 인용한 것이요. 하여튼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알 수 없으나, 이 정도 해명해 두지요. 앞으로 발탈 조사 경위를 말할 경위가 있으면 김 양의 채록도 밝힐 것이니, 이 점 오해없기를 바라고 김양의 말 애교있는 말로 받아들이겠소.

이 기회를 통해 동지적 입장에서 서로 돕기를 바라고 일본 갔을 때는 많은 후원있기를 바라면서 그간 내가 쓴 글의 목록집을 보내드립니다. 참고하기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1992년 3월15일 서울 대치동 미도아파트에서 정병호 ]

 

 

 

* 이매방(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에게 무용지도를 했던 이동안 옹

 

 

1991년 6월27일, 나는 한국 서울로 건너가 이동안 옹을 만나 녹음을 따두었다.

 

녹음장소는 서울 휘경동에 있는 ‘이동안 발탈연구소’였다.

(이 테잎은 지금도 내가 보관하고 있음.)

 

 

“할아버지 이 대본을 누가 만들었지요?”

 

“.....이 발탈 연희 대본(1989년 10월22일 중앙국립극장 소극장 공연 팜플렛 기재된)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김응수허구 김경원 양 둘한테 내가 근 1년 동안을 발탈을 가르쳐서 둘이서 이 대본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본을 마치 정병호씨가 만든 것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거는 다아 김 양이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비양심적으로 살면 안되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이라도 이걸 들으시고 판결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제자 김양을 만나니, 반갑고 한편으로 섭섭하기도 하고...눈물도 나고 그렇습니다....”

 

며 고령의 이동안 옹은 울먹이다가 삐져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렸다.

 

 

(그런데, 이런 일화까지 언급을 해야하나 모르겠다.)

...이제사 처음 하는 얘기지만, 실은... 이동안 옹은 ‘발탈’ 공연 때에 악사비를 몇 차례나 더 내놓으라며 공연직전,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우리 단원들에게 협박 수준의 요구를 했었다.

 

너무 어렵게 살아오셨던 분이시라 몇 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공연 첫날 (악사들에게 돈을 건네주려고) 우리로부터 받은 돈을 가지고 집에서 나오다가 버스 안에서 그 돈을 소매치기에게 쓰리를 맞았다고 또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 돈을 지금 당장 또 안내놓으면, 악사들 때문에 공연을 취소시킬 수 밖에 없다고 생떼를 쓰기도 했다.

 

이후, ‘발탈’이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제79호)로 지정, 승격이 되고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이동안 옹의 제자가 되겠다며 그에게 다가왔다.

 

제자가 되겠다고 이동안 옹을 찾아온 모든 이들에게 ‘내가 너를 발탈의 전수자로 키워줄 테니, 돈을 달라.’며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나는 그렇게 삽시간 변해버린 이동안 옹에게 배신감과 염증을 느껴, ‘전수자’고 뭐고 다 집어던져 놓은 채, 그를 멀리해버렸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 어려운 시절 광대로 살아오면서 평생토록 얼마나 돈에 사무치고 한이 맺히셨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동안 옹의 서거소식은 일본에서 접했다. 그 분과의 인연과 함께 했던 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이동안 옹은 어렸을 적 화성 재인청에서 이매방(2015. 8월 死. 은관문화훈장 2등급 추서)에게 살풀이 승무 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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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가 일본 통신원으로 있었던 <스테이지 뉴스>(1988년도) 표지에 소개된 소극장 '공간사랑'

 

1979년 '발탈'을 공연했던 원서동 '공간사랑'은 2013년 12월 서울특별시(시장: 박원순)에 의해 우리의 미래유산으로 추진되고 있다. http://futureheritage.seoul.go.kr

 

그러나, 개발독재 시대 전횡(專橫)의 건축가 이수근이 지었고, 그는 더구나 남영동 '대공분실'(서울 용산구 갈월동 88번지, 치안본부대공보안분실) 을 설계한 장본인이라서 반인권 반문명의 건축인으로 몰아부쳐 반대의 여론도 분분하다.

 

 

* 1976년 당시 김치열 내무부장관의 이름으로 공사가 발주됐고 전두환 말기에 경찰로부터 그곳에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1987년 1월 14일 사망, 당시 23세) 열사의 사망 현장, 김근태 민주당 고문이 1985년 이곳에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을 당한 곳, 숱한 민주인사들이 고문받던 장소로 사용된 곳. 이 장소에서의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당시 고문타살을 은폐하려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종말에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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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UOQjw3N7-tM


<발탈>을 아시나요?

버선발 한 쪽에 탈을 씌워 노는 우리의 전통연희극입니다.


40년 전 그러니까 1979년 7월28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사랑'에서 첫 발표공연을 한 후,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이 되었구요.


조선의 마지막 예인, 이동안(李東安) 옹으로부터 처음으로 전수를 받았던 김경원(金京媛) 씨가

이번에 극본을 쓰고 연출한 <창작발탈 '시조창이 머시여?'>를

2019 년 7월6일 토요일

충북 제천의 '여성문화센터'에서 선을 보인다네요.


그 재미가 쏠쏠하다는군요.

여러분, 꼭 보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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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첫댓글 13.08.16 10:59

    여기저기 흝어져있던 사진들을 모아보았습니다.
    글 연재에 대한 의견수렴 중입니다.
    앞으로도 여러 조언들을 댓글로 써주신다면 글을 연재하는데, 큰 참고사항이 될 것 같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답글
  • 13.08.16 14:19

    단백하고 군더기 없는 글이 참 보기가 좋습니다. 어쩌면 딱딱할수도 있는 내용인데도 경쾌하고 흡인력이 있는 작품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연극과 예술의 다양한 측면에서의 접목과 실험정신이 빛이 납니다.

    연극계에 사실 내놓을 만한 작품이 드문것 같아서
    선생님의 글은 한국의 연극과 극단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귀한 글을 아직 여러가지로 부족함이 많이 이곳에 게제해주셔서 다시한번 머리숙여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책을 처음 접하곤 연극이의 몸짓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영감을 주고 삶의 질을 풍성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우리네 토양과 정신이 적

    답글
  • 13.08.16 14:21

    절하게 녹아있는 것 같아서 모양새가 아주 좋습니다.
    마치 정갈하게 잘 차려놓은 밥상이라고 해야 될
    까요 이것저것 다채롭습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 몸짓과 정신과 시대의 아픔과 설움을 잘 비벼놓은 것 같네요

    답글
  • 13.08.16 14:46

    과찬의 말씀입니다. 고맙습니다.
    책 출판 시에는 님을 서평인으로 모셔야 될 듯 합니다. ^^ㅎ

    답글
  • 13.11.08 03:58

    발탈이 참으로 기발합니다. 오늘 현대놀이극에서 재해석해서 내 놓아도 손색이 없겠는데요^^ 그 예전에 발탈이 공연되었다니, 놀랄일입니다. 인형극을 접목해서 새롭게 재해석한다면 참으로 신선한 그림이 그려질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생님의 연극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했군요,,, 선생님의 춤사위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종합예술적인 기교와 재능이 풍부하게 넘쳐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