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일본 도쿄(東京) 한복판에서 '남북통일'을 외치다. [48] Araria 10.08.11
- 도쿄 한복판에서 남북통일을 외치다 나는 민단과 조총련 재일동포 문화행사에 빠지지 않고 나갔다. 내 나이 또래의 그들과 밤늦도록 거리에서 조선(=한국)춤도 추며 어울렸다. 일본인과 동포들의 사물놀이 ‘도쿄 비빔밥그라브’가 두드리는 고향가락에 흥이 나서 이동안 옹으로부터 배웠던 나의 춤실력을 피로한 뒤로, 나의 존재가 그들 사이에서 더욱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덩실덩실 춤을 추면 모두가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으며, 동포들이 좋아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 큰 행사를 북한(북조선)없이 남한만이 주최한다는 일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외국인들과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있지만, 같은 동포들끼리는 금단의 지역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남쪽에서 열리는 월드컵은 북녘동포가 빠진 반쪽 대회가 된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남녘에 모여 하는 이 행사에 어째서 북녘만이 참석을 어째서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리민족은 한가족, 한겨레이면서도 왜 이다지도 지구상의 가장 먼 곳으로 떨어져 있는 것일까? 강대국의 싸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탄만 하는 일은,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도 슬픈 일이다. 우리는 언제 돌아가실 지도 모르는 이산 가족분들의 장수를 기원드릴 수 밖에는 할 일이 없질 않다는 말인가! 나는 한민족이 숙원, 남북통일로에의 기원을 일본 무대에서 한마당 형식으로 엮어 구성을 해보기로 하고, 무세중(전위예술가)을 일본으로 초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국영사관에 공연신고를 위해 오사카 영사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들은 답변은 단호했다. “김경원씨. 부모형제가 있는 한국으로 무사히 가고 돌아가고 싶다면 이 공연, 하지마세요.” 나는 대비책으로 서류상에 일본인들을 기재(극단 ‘가와치만자이 이치자’(南河內万歲一 座), 그룹 '88in Japan)했고, 그들을 앞세웠다. 그리고 1988년 8월3일, 도쿄東京/신쥬쿠 新宿 의 시어터·모리에르 소극장에서 이 공연을 벌리고야 말았다. 공연(퍼포먼스) 명은 <통·막·살 =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88>(부제: 88아리랑에 고함)이었다.
윤이상(尹伊桑)의 음악, 〈 크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리울' (15''6')〉(1968년 작)도 배경으로 택했다. 이 무대는 그러니까, 독일에서 8년 동안 활약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행위예술가 무세중(巫世衆)이 일본에서 연극활동을 하던 내가 손을 잡고 이루어 낸 것이다. 공연(퍼포먼스)은 극장 전체를 한반도로 설정했다. 무대 한 가운데의 공간을 광목베로 가로막아 38선를, 무대의 4각 귀퉁이에는 미국, 소련, 중국, 일본 국기를 배치해 4강대국에 의해 희생된 한반도를 상징케 했다. 갈라진 한민족의 고통을 행위예술가 무세중(南男 역할)과 김경원(北女 역할)이 대신한 것이다.
(사진: 오야마 타다시 小山 正)
우선 무대 사각의 코너를 각 일본, 미국, 중국, 소련의 국기로 장식한다. 무대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넓따란 흰 무명천. 무명천의 북쪽에 있는 나는, 기천무를 추며 정신을 집중한다. 남쪽에서는 무세중이 자신의 몸을 막걸리 속에 담궜다가 진흙 위를 뒹구른다. 우리는 서로 천 앞에서 기척을 서로의 기척을 느낀다. 나는 남자(무세중)가 무명천 가까이 와 몸을 부딪히려고 함을 엿보고 있다가 큰 붓에 여러 색의 물감을 묻혀 그 자국을 그린다. 몇 번이라도 좋다. 어떤 형태의 몸짓이라도 좋다. 흐느끼는 고통하며 3.8선 위에 부딪혀지는 몸짓들이다. 그 모습이 여러 물감으로 힘찬 선으로 보여진다. 남이 북을, 그리고 북이 남을 그리는 몸짓 몸짓들.... 내가 입은 흰 저고리, 검정 치마가 땀과 눈물, 물감으로 엉망이 된다. 얼굴화장과 단정하던 머리모양은 엉망으로 풀어헤쳐 있고, 물감묻은 버선 한 쪽은 이미 벗겨져 무대 위 저만치에서 굴러다니고 있다. 연습콘티대로 열정과 절제를 함께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계획은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았다. 무대 바닥에 쓰러져 무명천을 노려보고 있던 남자는 숨찬 호흡을 재정리하며 자신의 온 몸을 또 천 위에 데쉬를 한다. 그의 알몸(팬티 차림)은 붉은 진흙으로 뒤덤덕이 되고 있고, 얼굴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잔인하기만 한 음악(시간. 역사) 또한, 그런 식으로 지나만 가고 있다.
마루 객석에 털썩 앉아있던 모든 관객들은 공연 전에 나눠준 무명 천을 윗옷에 걸치고 있었는데, 꽤 많은 이들이 감기에 걸렸는 지, 작게 코훌쩍이는 소리들이 들렸다. 나중에 눈치 챈 사실인데, 객석 여기저기에서 그들은 작은 소리로 울고 있었다. 관객들은 민단, 총련, 일본인 할 것 없이 모두가 눈물 흘리고 있었다. 우리의 이 공연이 자기 땅(고국)에서 유배된 자들, 재일동포의 가슴의 상처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진:김정곤 재일동포)
남남북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 앞에 가로막혀 있는 커다란 천을 찢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로를 몸을 확인하며 부둥켜안고서 감격의 재회를 한다. 최후의 분단민족, 조선민족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치달은 고통의 합침이 급기야 38선 상 위에 쳐놓은 광목천이 찢겨짐으로 해서, 그 두 사람을 해후시키는 구성으로 전개되었다. 이 공연을 소리없이 지켜보던 객석의 민단과 조총련계의 동포관객들은 두 배우의 아픔이 자신의 것인 양 어느덧 작은 흐느낌을 내고 있었다. [ 이 공연 ‘통막살’의 성과는 슈르리얼리즘의 연극을 시도, 아르토의 잔혹연극론을 무대 위에 실천했다는 점이겠으나, 그보다도 더 큰 수확은 서구현대연극의 이론적 모체가 되는 이 연극의 조류를 수용함, 그리고 한국의 무속과 민속의 연희전통을 의식해 그 표현 수단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중략)....남북의 장애를 무너뜨리려는 감동적인 순간을 극화한 ‘통막살’은 그 제의성과 공간구성과 민속적인 음악과 음, 소도구 및 대도구, 동작과 춤에 있어서, 한국의 무속과 민속 안에서의 융화된 강렬한 무대를 낳아주었다. 통막살은 우리 모두가 체험한 역사 가운데에서도 죽음에 대한 인식이며, 죽음의 한을 위로하는 진혼곡이며, 새로운 탄생을 위해 기어코. 육체도 내던졌던 것이다. -연극평론가, 이태주. ] 이 공연의 뒷풀이 때 들려온 웃지못할 얘기이다. 내가 연기를 하는 쪽에 자리를 했던 관객들은 물론 반대편의 무세중 선생이 연기하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그것은 연출의 의도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젊은 여성이어서 반대편에서도 젊은 남성이 등장하는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왠 걸! 뱃살과 나이가 많은 남자 연기자가 나타났단다. 그 해후장면에 사용했던 음악도 하필이면 판소리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이었는 지라, 아버지와 딸의 상봉으로 알았다는 한 관객이 있었는데, 무세중은 뱃살을 빼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이 공연이 무대에 올려지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분들이 도와주었다. 적은 비용으로 전단 디자인을 해준 후지모토 이사오(藤本 功), 하나부터 열까지 오야마 타다시(小山 正 화가)가 멀리 후쿠오카(福岡)로부터 비행기로 날라와 나를 도와주었다. 그가 프랑스 유학시절 만난 미술가들...고지마 겐이치 (小鳥顯一), 다즈루하마 일치로(田鶴浜 一郞)가 극장입구에서 티켓 판매 등의 일을 해주었다. 재일동포 김덕철(다큐멘터리 감독/현재 서강대 영상대학원 교수)의 도움도 컸다. 사진은 김정곤(재일동포 사진가)과 같은 학교(오사카 예술대학)에 유학 중이던 최광호가, 조명은 나랑 같은 학과, 무대예술과에서 공부하던 최 춘이 솔선해 스탭으로 뛰어주었다. 정말 그 분들의 고마움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소품, 일본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은 빨간 다라이와 막걸리 등을 준비하려고 도쿄 변두리의 뒷골목을 찾아 헤매던 고생도 이제는 행복한 일로 기억된다. 공연의 뒷풀이 장소로는 공연한 극장 근처에 있는 6, 70년대 일본 학생운동 당시, 노래운동의 거점이던 ‘도모시비’로 정했다. 무세중(1937년 생) 선생은 가게에 손님으로 와있던 동세대 일본인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며, 새벽까지 공연 뒤의 감격을 씹고 또 씹고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해 「아리랑」을 목이 터져라 부른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아리랑」은 노래라기보다는 한의 울부짖음 즉 '아이고'와 같은 울음이라 해야 옳다!" 이 말은 나의 통역으로 일본인들에게 분명히 전해졌다. 무세중이 울며부른 「아리랑」을 듣고 있던 다른 테이블의 몇몇 일본인들은 그 자리에 있던 한국(조선)인들에게 일본인(과거 역사의 가해자)으로서 죄를 빌기라도 하듯, 눈물을 글썽이며 조심스럽게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불행했던 한 · 일의 과거, 이로 말미암은 시대의 고통이 가득 담겨진 노래 「아리랑」을 다함께 외쳐불렀다.
재일동포 박철민(잡지 ‘새누리’ 발행자)과 김덕철(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은 언젠가 세워질 ‘통일 박물관’에 넣겠다는 약속으로 물감으로 얼룩진 무명천을, 오야마는 물감으로 더럽혀진 내가 신고, 공연을 했던 버선을 가지고 갔다. 우리는 지금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쪽이 없는 '아리랑 축전', 북쪽이 없는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같은 행사 등을치루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겨레의 모습이 마치 짝잃은 원앙새와도 같아 가슴이 저며온다. 같은 달, 서울로부터 방일한 이애주(무용가)씨는 오사카의 이쿠노구민센터(8월9일)와 도쿄 법정대학관 홀(8월12~13일)에서 공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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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자랑입니다....화이팅! 힘내세요...^^
쥐새끼들이 깜짝 놀라 개거품 물수 있도록 영화에 최선을 다해 주세요...



짝~~~~~~~~~~~~~~~~~~~~~~~~~~~~~~~~~~~짝짝!!!!!^^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더 먼저 우리가 더 많이 우리가 더 크게 아량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만국기를 게양할 때는 세계의 국기는 모두다 걸어도 인공기만은 제외해야 하는 것을 보니 아직도 우리는 미숙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볼수록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아라리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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