黨 제1서기/2014 (은커, 보드카)

[스크랩]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퐁당퐁당 당수 2014. 7. 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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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침몰한 지 벌써 70일이 넘었고, 아직도 몇 분의 희생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끔찍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심지어 매번 희생자들이 발견될 때 마다 나오는 “지금 몇 명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당국의 집계조차도 믿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그런 대형 여객선에 승객이 몇이나 타고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집계하지 못하는 당국의 허술함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이 입었을 상처와는 그 깊이를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우리 모두 역시 충격을 받았고,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모두가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이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과연 이 엄청난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슬픔은 잊혀진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어떤 기억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식탁에 앉아 그릇을 앞에 두고 차마 한 술 뜨지도 못하고 울고 있는 모녀를 바라보며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고민을 하기는커녕 내 자신부터 주체하기 힘든 슬픔과 고통을 느껴야 했던 기억, 그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도대체 어찌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했던 아픈 기억이라 해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진다.

부모님께서 돌아 가시고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심지어 자식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지켜보며 느꼈던 고통이라 하더라도, 가슴 속 어딘가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놓을 뿐 모든 인간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게 인간의 본질이며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속성이다.

오히려, 그런 슬픔을 견뎌내지 못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든 주변에서 나서서라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 도리이며,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간직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상처를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비록 아프지만 건강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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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실수, 반복되는 슬픔

한 번 하면 실수이지만, 두 번 하면 바보가 된다. 인간은 경험에서 배울 줄 아는 동물이며, 한 번 저지를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동물이다.

내가 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우리가 감내하기 힘든 슬픈 사건이 터져 버렸다면, 우리는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생기지 않도록 막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깊은 슬픔을 겪어 냈다면, 이제는 우리 사회에 그런 슬픈 사건이 두 번 다시 생기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할 차례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겪었던 슬픔이 아니라, 우리가 저질렀던 실수인 것이다.

반복되는 슬픔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로 얻어진 방향으로 행동을 해야 한다.

물론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규모로 발생한 사건들은 어느 한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사회적인 실수가 왜 발생했는지조차 알아내기 힘들고, 누구의 책임인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어디를 바꿔야 하는지 조차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더 힘든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세월호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느 작은 한 부분이 기능을 하지 못해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사회 전반에 걸쳐 장기간 누적되어온 수많은 잘못들의 조합이 이런 참사를 빚어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더 두렵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 누적된 기능적 모순들이 언제 또 순식간에 조합을 이루면서 제 2, 제 3의 세월호 사건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는 이 상황은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서 해결을 해야 할 지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우리 각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까지 느껴진다. 슬픔과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 엄습하는 이 무력감을 감당하지 못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토하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포기할 수 없다

헤밍웨이는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라고 얘기를 했다. 무서운 현실 앞에서 무너질 수는 있어도 인간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끝나는 것이며,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가슴 속에 남겨진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서도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시는 이런 슬픈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생기지 않도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동료들이 이런 슬픔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니 동료들이 문제가 아니다. 나와 내 가족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이 사회를 좀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 내야 하며,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언제고 다시 이런 거대한 슬픔의 파도가 나와 내 가족과 나의 동료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공동체를 덮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똑바로 쳐다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일어서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잘못해 왔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시스템의 붕괴는 누적된 실수의 결과

우리 사회 곳곳에는 수많은 작은 실수들이 누적되어 있다. 그런 실수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누적되기 시작하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세월호의 교훈이다. 작은 실수는 실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작은 실수들을 보면서도 수정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불의이다. 그런 불의들은 한 번 시작되면 누적되기 시작하고, 누적되면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작은 실수를 묵인하고 덮어 넘기는 불의들이 누적되고 전파되기 시작하면 사회 전체의 문화가 병들기 시작한다. 합리적으로 작성된 규정과 매뉴얼들은 귀찮은 겉치장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고 규정대로 하자는 주장은 유연하지 못한 고지식으로 비하되어 따돌림을 받는다. 비용의 문제 앞에서는 모든 안전규정이 무시되기 시작하고 매출을 위해서는 무리한 일처리가 일상화 되기도 한다.

안전을 위한 각종 규제장치들은 크고 작은 뇌물 앞에서 무력화 되며, 그렇게 절감된 비용과 그렇게 늘어난 매출은 말초적인 쾌락을 동반하는 접대로 이어져 소비된다. 뿐만 아니라 말단부에서 그렇게 모아진 돈은 중앙으로 집중되어 불법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가고, 법과 규정을 무시하는 이 사회 최상층부의 부패의 연료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하고 겉에서 보기에만 번쩍거리는 시스템이 사실은 내부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져 있고, 아무 것도 아닌 약간의 충격 만으로도 심각한 사고로 발전할 수 있는 시스템 차원의 위험요소로 곳곳에 숨어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총제적인 부정과 부실에 우리 모두가 관련되지 않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각종 기업체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은 과연 자신의 업무 범위 내에 이런 누적된 문제들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물론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라고 돌려 버리는 것은 쉽게 말해 아무의 책임도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는 확실한 진상규명과 함께 가혹할 정도의 처벌을 안겨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형 자동차 메이커들은 원가 절감을 위해 취약한 부품을 채택하는 것이 일상이며, 그런 이유로 발생한 결함들은 운전자의 부주의로 치부되곤 한다. 수많은 건설 토목업체에서는 규정을 다 지키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는 반문이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각종 관급업체들은 치열한 영업경쟁을 하고 있으며, 그렇게 소모된 과도한 영업비는 납품할 물건의 품질을 낮춰 회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모든 문제들을 사소한 것들이라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인류의 힘으로 도저히 복구 불가능한 사고를 낼 수도 있는 원자력 발전소에까지 검사과정을 속이고 불량 부품이 납품되어 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난 결백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단언컨대, 결백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직 사회에 나오지도 않은,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가장 많이 희생 당한 어린 생명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뿐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우리들의 누적된 잘못에 대해, 그 꽃다운 수백의 어린 생명들을 대가로 지불하고 말았다.

이래도 나는 죄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얘기를 한다. 코 앞에서 불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봐도 언제나 가만히 있으라고 강요를 한다. 나서봐야 너만 손해라고 제법 합리적인 척 하면서 설득까지 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비아냥거린다.

그렇게 모두가 합의하에 가만히 있었더니 가라앉아 가는 배에서까지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얘기를 한다. 그리고 모두가 죽었다.

우리 또한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침몰해가는 이 사회와 함께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난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물론 나 혼자 도망가고 싶지는 않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이 사회 공동체를 버리고 도망갈 생각도 없으며 현실적으로 도망갈 능력도 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사회가 침몰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내 가족과 내 동료들과 나와 함께 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구성원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고 싶지 않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작은 불의를 보고 참지 않을 것이며, 비록 내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바로 잡으려고 노력을 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며, 내가 못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하라고 얘기라도 할 것이다.

물론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게 될 지도 모르고, 내 입을 막으려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들도 가만히 있지 말라고, 뭐라도 하라고, 당신이 하지 않으면 이 사회는 침몰할지도 모른다고 얘기할 것이다.

슬픔도 잊을 것이다. 고통도 덮어 버릴 것이다. 절망도 무력감도 모두 흘려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세월호 사건을 겪어내고 나서 앞으로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바로 이 한가지뿐이다.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

 


출처 : 보드카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유라시아 문화연대>
글쓴이 : 이석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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