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당퐁당 당수 2013. 11. 26. 23:58

이글은 음악평론을 하는 후배 김작가가 올 여름에 쓴 글이다. 음악적 견해는 나와 많이 다르지만 냉면에 관한 느낌은 전폭적으로 동의하기에 이 글을 퍼왔다. 그리고 이 글에 등장하는 기형도와 성석제는 대락 문학회 후배들이다. 대학시절 어지간히 술을 자주 마셨고, 졸업한 후에도 기형도가 문화부 기자를 할 때도  TV  프로듀서로 일을 한지라 자주 어울렸다. 한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고 성석제는 최근 소설집을 내놨는데 게을러서 아직 읽지를 못했다.

냉면

image



맛있는 집이 있다고 하면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으며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기꺼이 혼자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연애를 하면 최소 2년은 같은 집에 안 데려갈 자신이 있다. 평생 맛있는 것만 먹일 수도 있다. 식도락을 취미로 한다면 이 정도 자세는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하고 많은 음식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걸 꼽으라면 단연 냉면을 꼽는다. 식도락의 입문이 냉면이기도 하다. 함흥냉면은 안 쳐주고 오직 평양냉면만을 먹는다. 

서울 시내에 맛있다는 냉면집은 다 가봤다. 첫 째를 꼽으라면 우래옥이고 둘 째를 꼽으라면 을밀대다. 을밀대는 나에게 평양냉면의 맛을 알려준 은인같은 존재다. 2003년 5월이었다. 지금은 광장동에서 신춘 후라이라는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당시에는 줄리아 하트의 제작자였던 볼빨간(A.K.A 서준호)가 평양냉면 한 그릇 하자해서 쫄래쫄래 따라갔다.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이 동행했다. 얼음 둥둥 떠있는 육수를 쭈욱 들이키고, 쫄깃쫄깃한 굵은 면발을 씹는 순간!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맛에 압도되어 그 큰 사발을 몽땅 비워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회냉면을 한그릇 시켜서 두루두루 나눠 먹었다. 왜 나이든 아저씨들이 평양냉면을 모두 좋아하는지를 나는 그때 알았다. 뭔가 빼도박도 못하고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당시는 성석제를 한참 좋아하기 시작했던 무렵이기도 했다. 그의 첫 소설인 ‘스승들’에 보면 기형도 얘기가 나온다. (실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둘이 연대에서 한창 같이 놀던 시절, 기형도는 수업이 끝나면 성석제를 을밀대로 끌고 가 냉면에 소주를 비우며 문학과 세상을 논하지는 않았을테고, 수다를 떨곤 했더란다. 그런 사연도 있고, 집에서도 비교적 가깝고 해서 을밀대는 오며가며 들려 한 그릇씩 비우곤 하는 단골집이 되버렸다. (을밀대는 역시 두 셋이 가서 녹두전에 물냉면 한그릇씩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렇게 평양냉면의 맛을 알게 된 후, 서울에 있는 맛있는 평양냉면집은 두루 다니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냉면집을 꼽으라면 그 이름도 유명한 우래옥이다. 개인적으로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서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는 소신을 갖고 있지만, 우래옥만큼은 예외다. 여름에 먹는 냉면이란 겨울에 먹는 오뎅탕(부산 삼진어묵으로 끓인 거면 더 좋다.)에 정종(백화수복도 능히 좋다.) 한 잔 만큼의 행복. 한 시간 정도 기다려서 그 행복을 혀로 느낄 수 있다면 능히 기다릴만한 것이다. 메뉴판에는 없는, 메밀의 함량이 더 높은 순면을 한 그릇 시킨다. 미리 사리도 추가해놓는다. 5분쯤의 시간이 흐른다. 식사가 나온다. 반찬도 무 김치 하나다. 좋은 유기 그릇에 냉면 타래가 담겨 있고 소고기와 무, 오이 (겨울에는 배)가 고명으로 얹혀 있다. 침이 고인다. 식초와 겨자도 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맛을 즐긴다.  노란 빛 감도는 면을 젓가락으로 집는다. 면발이 툭툭 끊어지며 메밀의 질감과 면에 베인 육향이 혀를 타고 비강으로 흐른다. 아아, 평창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메밀을 추수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보…일리가 없다. 그릇을 들어 적당히 시원한 육수를 후루룩 들이킨다. 오오, 기름진 목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가을을 맞아 가일층 살을 찌워가는 한우의 울음소리가 들…릴리가 없다. 그냥 메밀향과 면의 치감과 육수의 농후함에 압도되어 코마 상태에서 냉면을 먹을 뿐이다. 젓가락 집는 손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채 면발을 다 삼키기 전에, 또 새로운 면발을 입에 넣고 싶은 것이다. 정신을 차린다. 식초와 겨자를 조금 친 후, 다시 심기일전한다. 이 맛을 최대한 천천히, 그리하여 최대한 깊이 느끼고야 말리라. 일부러 느릿느릿 젓가락질을 하고 오래오래 꼭꼭 씹는다. 씹을수록 면과 육수가 한 곳에 섞여 정신을 카오스로 몰아간다. 입속은 베수비오 화산이 되고 폼페이 화산이 된다. 가히 세계의 종말을 촉진시킬만한, 맛의 대폭발이다. 이미 배는 불러오건만 혀는 멈추지 않는다. 위는 아, 이럴 때 좀 더 내가 컸으면 하며 비명을 지른다. 그릇이 갓 설걷이를 끝낸듯 깨끗이 비워졌지만 충만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하다. 이 맛, 이 기쁨을 좀 더 누리고 싶다는 심원한 욕심이 아귀의 그것처럼 요동친다. 

이런 이야길 하면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닝닝한 걸 뭔 맛으로 먹냐고. 그런 사람과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연인은 될 수 없다.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사실, 냉면처럼 담백한 음식은 없다. 신구가 그랬던가. 냉면은 면맛, 육수맛 딱 그 뿐이라고. 그 담백함을 두고 서울의 전통있는 냉면집들은 총성없는 전쟁을 벌인다. 더없이 심플하지만 그 안에 한없는 변주가 있는 게 바로 냉면이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 사는 것도 냉면처럼 담백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계산하지 않고, 잡생각하지 않고 담백하게. 도를 깨쳐야 가능한 경지이려나. 그래서 나에게, 냉면이란 맛의 도(道)다. 이르고 싶은 삶이다. 

2013.7.빅이슈 코리아

출처 : 은행나무아래 커피향
글쓴이 : 이석현 원글보기
메모 :